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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

'반일 종족주의' 요약정리 3 -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

 

 

"거짓말의 나라'

 

"거짓말하는 국민"

"거짓말하는 정치"

"거짓말하는 학문"

"거짓말하는 재판"

"반일 종족주의"

 

 

 

안녕하십니까~ 인생을 설계하는 Desugner Jun입니다.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반일 종족주의' 요약정리 3 -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책에 대한 서평으로 더 보기 원하시는 분은 서점과 도서관을 통해 책을 정독해주세요 ~


목 차 2

 

종족주의 상징과 환상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가. 백두산 신화의 내막

한국인이면 누구나 동의하듯이 백두산은 민족의 산입니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릅니다.

장백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자세히 읽으니 15세기까지도 화산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곳에서 하늘에서 단군이 내려오셨다니, 그것 이상한데"라는 회의감이 왔습니다.

그 이후 백두산 관련 자료를 읽게 되면 유심히 메모해두기 시작하였고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된것은

20세기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 부부(2018년 9월 20)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3대 세습 통치자 김정은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사진에서 보듯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습니다. 그곳은 북한의 신정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신성한 공간입니다. 거기에 남한의 대통령이 올라 백두혈통의 계승자와 손을 마주 잡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어떠한 운명을 

우리에게 예보하는 것일까요. 


나.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

독도는 오늘날 한국인을 지배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가장 치열한 상징입니다.

남북한을 통틀어 민족주의의 최고 상징을 들자면 아무래도 백두산입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조선시대부터 나름의

큰 상징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성립 이후, 그것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1883년부터 울릉도에 살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멀리 동남 해상으로 어로를 나가면서 거기에 홀로 있는 섬을 가리켜 '독도'라고 부르고 쓰기 시작했다고 짐작됩니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는 주민의 공동 인식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중앙정부가 독도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거나 관리를 보내 탐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토의 사방 경계를 명확히 할 목적으로 전국을 과학적으로 측량하고 지도를 그릴 필요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대한제국의 역량과 수준을 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1900년 울릉 군역을 획정할 때 독도는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주지하듯이 1904년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어떤 계기로 독도의 내력을 조사한 다음, 그것이 조선왕조에 소속한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였습니다.

2년 뒤 1906년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울릉군수가 "본군 소속의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만,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독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가운데 일본의 행위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국가 간 영토 분쟁의 '결정적 시점'이라고 합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하는 사실입니다.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발표하여 독도를 한국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이 후 한일 간에 독도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곤란한 문제를 두고 이승만 정부 이후의 역대 저부는 현명하게 대처해왔습니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방을 자극하는 공격적 자세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세에서 1965년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우호적 관계를 증진해 왔습니다.

그런데 2003년 노무현 정부부터 달라졌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독도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강경한 대응을 부르는 악순환이 증폭되었습니다.


다. 쇠말뚝 신화의 진실

"일제가 조선 땅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전국 명산에 일부러 쇠말뚝을 박아 풍수침략을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이 전설처럼 떠돌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두 거짓말 입니다.

미신 수준에서 떠돌던 증언을 근거로 김영삼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덜컥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 쇠말뚝 제거 사업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는 내무부가 전국의 각 시군읍면에 공문을 보내 기세등등하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지방 행정관청은 자기 마을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풍수침략을 위해 일본이 박은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줄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방 행정기관은 동네에서 풍수를 좀 볼 줄 안다는 지관이나 역술인, 속칭 점쟁이들을 쇠말뚝 감정 전문가로 동원했습니다.

1995년 2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월간 전국에서 접수된 주민신고는 모두 439건, 이중에서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밝혀져 제거된 것은 18개였습니다. 

쇠말뚝 제거 단체인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도 "쇠말뚝이 박혀있다고 제보가 들어온 지역을 가서 확인해본 결과 측량용 삼각점이 박혀있는 곳이 많았다."고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라.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출범하자마자 느닷업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건물을 '구 조선총독부 청사'라면서 '일제의 만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은 먼 옛날 조선총독부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출범한 현장이었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공화국에서 3공화국까지 중앙청 건물로 사용되어 왔던 유서 깊은 건물이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선동을 통해 미군정청 역사의 현장, 대한민국 제헌의회 개원 현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건국 현장,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부터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어 대한민국의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를 낳은 현장을 깨끗이 지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문민정부의 '민족 지상주의자'들이 행한 구 조선총독부 철거는 일제 침략의 현장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을 파괴한 반달리즘식 마녀사냥, 종족적 민족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화테러였습니다.


마. 망국의 암주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

조선이 멸망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된 요인을 꼽는다면 고종과 왕비 민비의 외교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난세를 돌파할 능력이 없는 나라는 줄이라도 잘 서야 생존이 담보되는 법입니다.

이것이 외교 및 동맹의 기본 원칙이죠. 흥미롭게도 고종과 민비는 세계사의 패권세력이 아닌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과 집요하게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하다가 대세를 그르쳤습니다.

한나라의 국왕이 국가의 안위는 내팽개쳐 놓고 자기만 살고자 일관파천, 미관파천, 아관파천, 영관파천을 시도한 사실을 보면 '이 사람 과연 국왕 맞나?'하는 회의감이 엄습합니다.

조선 조정은 내각 위기가 끊이지 않아 외국 공관들은 정부 각료가 1주일에 한 번씩 갈렸다는 통고를 접수할 틈도 없을 정도 였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고종 통치시대의 민낯이었습니다.


바.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이완용을 매국 행위로 이름을 더럽힌 인간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멸망의 모든 책임을, 특히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과 '을사오적'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을사오적' 이완용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을사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 특사에게 "새 협약의 성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 짐은 신병으로 피로하지만 당신은 밤늦도록 수고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소"라는 위로의 칙어를 내렸습니다.

11월 18일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보호조약이 지난밤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장안은 비분과 탄식으로 들끓었고, 상가는 항의를 위해 철시했습니다. 곳곳에서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을 '을사오적'으로 지목하고 "이 역적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쏟아졌습니다.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상소문 내용을 제보받아서 제멋대로 "황제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을사오적들이 일본에 굴종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했다"거 보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버린것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3부 -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장 4부 -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 는 별도로 다루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서점과 도서관을 이용하셔서 책을 구매 또는 대여하시기 바랍니다.

 

헬조선에서 모두가 성공하는 그날까지! 

 

Designer Jun의 성공을 위한 독서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