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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

'반일 종족주의' 요약정리 2 - 종족주의의 기억 -

 

"거짓말의 나라"

 

"거짓말하는 국민

"거짓말하는 정치"

"거짓말하는 학문"

"거짓말하는 재판"

"반일 종족주의"

 

 

 

안녕하십니까 ~ 인생을 설계하는 Designer J입니다.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반일 종족주의 ' 요약정리 2 - 종족주의의 기억 -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책에 대한 서평으로 더 보기 원하시는 분은 서점과 도서관을 통해 책을 정독해주세요 ~

 


 

목 차 1

 

종족주의의 기억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가. 황당무계 '아리랑'

조정래는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기 소설가입니다.

그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은 모두 350만부나 팔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한국인의 반일 종족주의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묘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소설 곳곳에서 일제가 한국인을 거의 광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조작입니다. 역사소설을 두고 웬 시비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자는 아무리 역사소설이라 하지만 실재한 역사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읽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재한 역사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리랑' 내에 있는 1944년 일본 지시마 열도에서 있었다는 학살 장면 한가지를 소개합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어 미국이 북쪽에서부터 지시마열도를 공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급하게 지시마열도를 군사기지화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습니다.

그때 수많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공사판에 동원되었습니다.일본군은 거짓 공습경보를 울려 1,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무자를 방공호에 가두고 30분간 수류탄을 던져 넣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그들을 몰살시켰고,

작가는 그 장면을 피가 도랑물처럼 흘러나온다는 표현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아리랑' 전권에 걸쳐 가장 참혹한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학살은 없었습니다.

그런 기록이나 증언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소설의 전후 문맥에서 대량 학살의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지시마열도와 훗카이도는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슷한 공사가 진행 중이였습니다.

어렵사리 동원한 노무자를 학살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소설 '아리랑'은 그 실재한 역사를 환상의 역사로, 곧 학살과 겁탈의 광기로 대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나아가 문학적으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 잠복한 종족주의 문화, 그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세계를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기 때문입니다.비록 외세에 눌렸지만 그 시대 우리 조상의 역사가 진정 그리하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도 자신을 근대적 인간으로 개발해 가는 우리 조상의 눈물겨운 노력은 정녕 그 시대의 역사가 아니였습니까?


나.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1960년대 이래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는 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 조선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1960년대 역사교육학회가 만든 교과서는 전체 농지의 절반이 국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했습니다.

1967년 어느 교과서는 전국 토지의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국정교과서로 바뀝니다. 이후 약 36년간 전국 토지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수탈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부는 토지를 신고하라고 농민들에게 신고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소유권 의식도 박약하고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몽매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신고 기한을 태연하게 넘겼습니다. 그랬더니 총독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토지를 총독부의 소유지, 곧 국유지로 몰수하고 그것을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의 이민에게 불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어떠한 학생은 수업시간에 반의 학생들이 함께 눈믈을 흘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세대 간에 눈물로 전승되는 것이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반일 종족주의 역사의식입니다.

1910년대의 조선 농민이 신고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조선왕조 500년간 우리 조상은 3년에 한번씩 호적을 신고했습니다. 중국의 명나라는 10년에 한번씩, 청나라는 처음에는 호적을 신고하였으나, 언제부턴가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것에 비한다면, 다시말해서 세계에서 가장 신고에 잘 훈련된 민족이 우리 조상이었습니다. 

토지의 40%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다는 학설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입니다. 우리 조상은 토지를 사람의 명맥, 곧 목숨 줄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자기의 목숨 줄을 끊는데 가만히 앉아있겠습니까? 누구나 결사항쟁을 하기 마련입니다. 침략자가 워낙 강포해서 어쩔수 없다고 쳐도, 그 원통함만은 잊지 않고 되찾을 기회를 노립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후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토지를 돌려 달라고 소리쳐야 마땅하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토지 대장을 보관하고 있는 전국의

군청과 법원 어디에도 그런 소란과 청원의 일이 있지 않았습니다. 

토지조사 사업 당시 일부의 토지에서 소유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전국 487만 헥타르 가운데 12만 헥타르에 불과한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이였습니다. 일제의 조선 병합은 몇 조각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총면적 2300만 헥타르가 되는 한반도 전체를 그의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의 토지가 얼마인지, 토지의 형질이 어떠한지, 소유자가 누구인지 조사한 것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 이나라가 펼치는 온갖 토지 행정의 기초 자료료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터의 번지와 주소는 언제 붙여진 것입니까? 다름아닌 1910 ~ 1918년의 토지조사사업에서였습니다.


다. 식량을 수탈했다고?

조선의 농민, 특히 소작농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결국 농업 생산성이 낮았고, 토지에 비해 인구가 넘쳐났으며, 소작농에게 불리한 지주제가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어 전통 사회 이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체 농가 중에서 지주의 비중은 3..6%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작료 수입을 통해 전체 쌀 생산량의 37%를 취득하고 있었습니다. 자가 소비를 제하고 상품화되는 쌀을 기준으로 하면 지주의 몫은 50%이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지주제의 문제는 해방 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을 통해 해소됩니다. 그리고 농촌의 낮은 생산성과 과잉 인구의 문제는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이농이 급속히 진행되고 농촌의 일손 부족으로 기계회 등이 이루어 지면서 비로소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일제시기 농민이 궁핍을 엉뚱하게도 일제가 쌀을 수탈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쌀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수출'한 것인데도 말이죠. 교과서가 '수탈'이나 '반출'이라는 표현을 포기하지 못한 것은, '수출'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자마자 자신을 일제 비판의 논리가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방식

일본은 구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지배했습니다. 한 나라의 주권을 문자 그대로 '강탈'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제는 바로 이점에서 비판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는 개인의 재산권마저 유린해서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토지나 식량을 마구잡이로 '수탈'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실생활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민족 간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의 조선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유 거래의 시장체제였고, 민법 등이 시행되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 없이 개인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수탈'이 일상화되고 '차별'이 공식화되어 있는 체제라고 한다면, 조선인의 반발로 식민지 통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영구히 편입하고자 했던 식민지 지배의 목표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허구를 만들어 내서 일제를 비판하는 것이 국내에서는 통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제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우지 못하는 교육, 이것이 우리나라 민족주의 역사교육이 빠져 있는 함정이고 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마. '강제동원'의 신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그 다수가 자발적으로 돈 벌러 일본에 갔던 조선인들의 근로에 대해서,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역시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노예노동·강제노동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도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사실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 '사회' 54쪽에 실려있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우리 민족'사진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위의 사진은 교과서 뿐만아니라 부산에 위치한 2015년에 개관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라는 곳의 

근로자로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은 추도하는 높은 탑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노무동원된 조선인과는 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진은 1926년 9월 9일 아사히카와 신문에 게재되었던 강제사역되었던 일본인의 모습을 찍은사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염전노예처럼 일본인이 일본인 자국민을 노예처럼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던 사건이였습니다.

 

이 사진은 책의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추모탑과 교과서에 게재되어 있었다고합니다.

이 같이 거짓말로 만들어진 반일 종족주의를 세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왜곡된 역사가 학생들에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주입되고, 그로 인해 반일 종족주의가 대를 이어 더욱 심각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

"조선인에게 임금을 차별 지급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필수과목인 한국사 교과서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혹사시켰다.",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정도 였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공제되어 실제로 받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또 하나의 역사왜곡입니다. 

임금의 평균을 계산해보면,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낮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는 조선인도 무척 많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당시 임금은 기본적으로 성과급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석탄 1톤을 캐면 얼마, 1톤을 운반하면 얼마, 이와 같이 계산되었습니다. 이 단가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월급에서 밥값과 저금, 세금 등 여러 항목을 공제하고도 월급의 45%이상이 현금으로 조선인에게  직접 지급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은 바로 이돈으로 술을 사 마시거나, 조선여인들이 있는 소위'특별 위안소'에 출입하거나, 조선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했습니다. 이 사실은 저자가 새로 찾아낸 자료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인 탄광부들의 임금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1940년을 기준으로 서울의 남자 월급과 비교하면, 탄광부의 평균 임금은 방직공의 5.2배, 교사의 4.6배, 회사원의 3.5배, 은행원의 2.4배 였습니다. 일본에 있는 일본인에 비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1944년,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은 일본인 대졸 사무직 초임의 2.2배, 순사 초임의 3.7배나 되었습니다.


사. 후안무치하고 어리석은 한일회담 결사반대

"오늘의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한다."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의식이다."

"우리의 주체의식이 건전하면 한일 국교 정상화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비굴한 생각이야말로 굴욕적인 자세다."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을 논박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담화내용 중 일부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누구의 말이 맞았습니까?

한일회담을 통해서 한국이 일본에 예속되었습니까?

한국이 경제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대폭줄였다는 사실입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한미일 3자 무역구조가 가능하였고, 그 덕분에 경공업 공산품 수출이 급증했습니다.

그 후에도 한국은 일본의 설비와 중간재에 의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업구조를 고도화해 갔습니다. 즉, 중화학공업을 추진했습니다. 여기서도 일본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포항 제철이라는 한국 최초의 종합제철소가 세워진 것은 일본의 자금·기술협력이 크게 도움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와 일번 경제 모두 한일 국교 정상화로 큰 이익을 보았습니다.

한일회담 반대론자들은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선후진국 협력의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문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일 협정으로 우리는 대문을 열어 젖혔고, 그 덕분에 오늘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

 

2부 - 종족주의의 기억 - 마치겠습니다.

 

3부는 -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 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헬조선에서 모두가 성공하는 그날까지!

 

Designer J의 성공을 위한 독서는 계속됩니다.